예천에서 시작된 꿈, 예술의 씨앗
박서보(본명 박재홍)는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선생님의 권유로 참가한 전국 포스터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하며 동양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반대라는 큰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림 공부를 심하게 반대하는 부모님 몰래 서울로 향한 그는, 결국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학과에 당당히 합격하며 부모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첫 등록금을 받아 들고 시작한 그의 예술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Park Seo-Bo in 1930’s. (1930s) | © PARKSEOBO
전쟁 속에서 길을 찾은, 대학생 박서보
1950년, 그는 홍익대학교 문학부 미술과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학업은 중단되었고, 서울 회현동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인민군에 끌려가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향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겨우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고, 이번에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살아남아 1951년 안성으로 돌아온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가 미군 가족 초상화를 그리고, 장교 식당 벽화를 그리는 등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Park Seo-Bo at the Gwangju Infantry School. (1954) | © PARKSEOBO FOUNDATION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정부는 입대 당시의 약속을 번복하며 현역 복무를 강요하였습니다. 현역 복무를 피하고자 박서보는 졸업식에 불참하고 친구와 함께 지은 가짜 이름으로 만든 가짜 시민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친구가 지어준 ‘박서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는 단순한 예명이 아니라, 그가 겪은 역경과 새로운 시작을 담은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젊은 예술가들이 꿈꾸던 등용문인 국립미술대전에서 입선하며 그의 이름이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4년 홍익대학교 첫 졸업전을 소개한 서울 신문 기사에는 ‘박재홍’으로, 1955년 국전 특전 25점에 대한 연합 신문 기사에는 ‘박서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찾은, 새로운 시선
1961년, 박서보는 세계청년미술가 초대전에 초청받아 파리로 향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자유아시아위원회의 지원으로 항공권과 보험료를 해결하며 간신히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도착 후 대회가 연기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파리에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새로운 시련을 마주했습니다.

Park Seo-Bo posing with friends. (1958) | © PARKSEOBO FOUNDATION
그는 쓰레기장에서 스타킹, 러닝셔츠와 같은 폐품을 주워 작품 재료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 ‘원죄’는 파리 청년 작가 합동 전시에서 1등을 차지하며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제6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서 국제 작가 초대부 일을 맡았고, 그의 작품이 여러 매체와 전시를 통해 보도되면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체념의 선(線), 새로운 시작
시간강사로 일했던 홍익대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그는 작업실을 마련하는 한편 가족들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작이 단순히 형식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적 정신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죠. 그는 약 2~3년 동안 작품 발표를 멈추고, 오롯이 내면과 예술적 탐구에 몰두했습니다.

Park Seo-Bo, Ecriture, Dansaekhwa. (1970s) | © PARKSEOBO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종이에 글씨를 쓰고 지우는 반복적인 행동을 관찰하며 그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로부터 탄생한 작품이 바로 ‘묘법(描法)’ 시리즈입니다. 캔버스에 연필로 선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그는 체념의 본질과 내면의 탐구를 예술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도쿄 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5가지 흰색전’에서 그의 출품작 4점이 모두 판매되며 큰 주목을 받았고, 야마모토 다카시를 포함해 일본 미술계의 저명한 평론가들로부터 세계적인 예술가로 평가받았습니다.
이후, 프랑스 카뉴쉬르메르에서 열린 제9회 국제회화제에 연필 묘법 시리즈를 출품하며 그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점차 입지를 다지며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