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1-57(1957) | © PARKSEOBO FOUNDATION
앵포르멜
박서보는 1958년 ‘현대전’에서 현대미술협회에 의해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현대전’ 작품을 준비하며, 마모된 석불상의 얼굴처럼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상 작업을 시도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끼던 중, 우연히 물감통을 집어 던졌고,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을 보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이를 작품으로 완성해, 제3회 현대전에 출품했습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이러한 회화 스타일을 앵포르멜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외국 작품을 접하기 어려웠던 그는 일본 잡지 등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불과 6개월 만에 앵포르멜 작가로 자리 잡으며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Primordialis No.4-63(1963) | © PARKSEOBO FOUNDATION
원형질
1961년, 박서보는 국제조형미술협회 프랑스 국내위원회가 주최하는 세계 청년 미술가전 ‘파리 초대전’에 초청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에 도착한 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작업 공간과 재료를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쓰레기통에서 찾아 낸 용수철로 캔버스의 빈 면을 고정하고, 대바늘을 이용해 조각 천을 이어 붙이며 캔버스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버려진 러닝셔츠를 주워 틀에 끼운 뒤 당겨 고정하며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원죄”였습니다. 이후 이 작품은 파리 청년 작가 회의에 출품되어 1위를 차지했습니다.
박서보는 전쟁 경험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 시리즈에 “원형질”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는 훗날 “가난이 창조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하며, 그림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그에게 ‘원형질’이란, 프랑스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며 폐자재를 주워 작업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Hereditarius No.16-70(1970) | © PARKSEOBO
유전질
1965년, ‘원형질’ 시리즈 이후 박서보는 그동안 해왔던 모든 작업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되던 시기로, 많은 예술 작품이 전통적인 색채와 한국적인 민주주의를 강조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서보는 아들 승호의 실루엣을 관찰하며, 강렬한 원색의 줄무늬를 활용한 기법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에서 ‘무중력’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 붓질 대신 에어브러시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새로운 작업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서양 미술에 깊이 빠져 헛발질하던 시기’로 회상하며, 본질로 돌아가고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비워냄’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Ecriture No.38-79(1979) | © PARKSEOBO FOUNDATION
연필 묘법
비워냄의 본질을 고민하던 박서보는 어느 날, 아들이 글을 쓰다 자꾸 지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던 그는 “내가 한 짓을 체념하며 지우는 행위가 스스로를 닦고 비우는 것일까? ”라는 깨달음을 얻으며, ‘묘법(描法)’ 시리즈를 제작하게 됩니다.
박서보는 변질이 잘 되지 않는 한지를 사용해 묘법을 작업했고, 하루 12시간 이상 연필심을 45도 각도로 잘라 선과 선 사이를 밀어내는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동일한 작업을 100번 이상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를 단순한 형식이 아닌, ‘무심’의 상태에서 이뤄지는 수행적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박서보의 묘법은 현대 미술사에서 단순한 작품을 넘어선, 중요한 과정 중심의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criture No.170807(2017) | © PARKSEOBO FOUNDATION
색채 묘법
2001년 가을,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던 박서보는 일본 후쿠시마를 방문해 반다이산을 등반하던 중 붉은 골짜기의 장엄한 풍경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검은색 연필을 사용해 묘법 작업을 이어왔지만, 자연이 선사하는 강렬한 색에 감동하며 새로운 색채적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기존의 단색 작업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강렬한 색채를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는 “사람들에게 치유가 될 수 있는 색감을 사용하고 싶었다”고 회상하며, 색채가 보는 이의 감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