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
박서보는 기존의 예술적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던 중, 우연히 둘째 아들 승호를 통해 ‘비움’의 개념을 깨닫게 됩니다. 승호는 글씨가 네모 칸 밖으로 삐져 나오자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결국 공책이 찢어지자 체념하듯 연필로 선을 그어버렸습니다. 박서보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무심(無心)’의 개념을 이해하였고, 이후 그의 대표작인 ‘묘법(描法)’ 시리즈가 탄생하게 됩니다.

Park Seo-Bo with his son, Park Seung-ho. | © PARKSEOBO
박서보는 “지우는 것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며, 생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문지 앞뒤를 모두 그어가다 보면 경계마저 모호해집니다. 삶과 죽음조차 하나가 되어 편안한 세계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무심(無心)의 개념을 정의하였습니다.
결국 그에게 ‘무심(無心)’이란, 선을 반복해 그으며 자신을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비움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인 경지인 ‘무위자연’에 도달하는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수행(修行)
박서보는 작품을 그리는 과정 자체를 ‘수행’으로 여겼습니다. 그에게 ‘수행’이란, 내면의 평정과 정신적 수양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는 일정한 방식으로 선을 긋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의 혼란을 비우고자 노력했습니다.

Park Seo-Bo in the studio. | © PARKSEOBO
박서보는 “세상에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불가해한 미지의 것을 계속 탐구해가며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서 더 풍요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묵묵히 반복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에게 예술은 시각적 표현을 넘어,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박서보의 철학
박서보는 그림의 결과물이 아닌 그리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화폭을 ‘신체적인 자기의 목소리로 채워진 자신의 내적 공간’으로 여기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서보는 일평생 선을 그어가며, “그림이 갖고 있는 진정한 드라마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Park Seo-bo’s photo taken at the artist’s studio in Yeonhui-dong | © 중앙일보
이처럼, 박서보는 선을 그리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세상과 깊은 교감을 이루어내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적 결과물을 넘어, 무심을 통한 내면의 탐구와 자기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2023년 10월 14일, 92세의 나이에 하늘의 별로 돌아간 박서보. 마지막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거장의 창작을 향한 열정과 예술적 여정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