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시작된, 예술의 새벽

환기미술관 본관에 설치된 김환기 화백 초상화 | © WHANKIMUSEUM
1913년,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예술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김환기는 도쿄 니혼대학교 예술학부에 입학해 학업과 함께 한국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했습니다. 재학 중 동료들과 함께 ‘아방가르드 영화연구소’를 설립하며 추상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이로써 현대 미술에 대한 실험적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열렸던 권위 있는 단체전 ‘이과전(二科展)’에 작품 「종달새 노래할 때」를 출품해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데뷔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부터 그의 독창적 감각과 예술적 방향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한국전쟁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강인함

6.25 피난민들이 지은 부산 산동네 판자촌 (1950’s) | © 뉴데일리
일본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김환기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젊은 화가들과 현대미술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과 과정에서 그는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 동인 단체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그의 삶은 또 한 번 격변을 맞았습니다.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김환기는 전쟁 중에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해군 종군화가단에 소속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으며, 이를 화폭에 담아 비극 속 희망과 생명력을 표현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환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난 열차」가 탄생합니다. 그는 이 작품에 전쟁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예술적 열정과 인간성을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우울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선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파리에서 찾아낸, 한국적 정체성

파리 시절 김환기 화백과 부인 김향안 여사. | © <월하의 마음> (김향안) 중
1956년, 김환기는 예술적 시야를 더 넓히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납니다. 파리에서 그는 서구와 동양의 예술 간 경계를 넘나드는 탐구를 이어갔으며, 깊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했습니다.
당시 김환기는 “나는 한국의 화가다. 내 그림은 동양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며, 토착적 미학과 한국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김환기의 작품은 ‘여백’과 ‘절제’라는 동양적 미학에 기반을 두고, 달, 매화, 백자 항아리 같은 한국적 소재를 추상적이고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발전시킨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철학은 그가 한국적 미학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난, 점과 여백의 미학

뉴욕 시절 김환기 화백과 부인 김향안 여사. | © WHANKIMUSEUM
1963년, 김환기는 뉴욕으로 건너가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뉴욕에서 그는 ‘전면점화(全面點畵)’라고 불리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확립하며, 기존의 구상적 형상에서 벗어나 점과 선을 활용한 완전히 새로운 추상미술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전면점화는 단순히 화면에 점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고국과 가족, 자신의 내면을 떠올리며 하나의 점, 나아가 수많은 점으로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창작 과정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개인적 감정을 점묘 기법으로 구현한 것으로, 점 자체가 작가의 사유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상징적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완전히 구상적 양식에서 탈피해 추상화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김환기의 작업은 단순한 회화의 단계를 넘어, 예술적 철학과 한국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김환기의 예술 세계, 그 후

@whankimuseum | © WHANKIMUSEUM
김환기는 일생 동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는 점, 여백, 절제를 통해 내면과 고향에 대한 깊은 사유를 화폭에 담았으며, 한국적 미학의 아름다움을 세계 미술사에 각인시켰습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