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가 시리즈: 화백 이우환 – 2편
관계항: 존재 간의 대화

고려대학교 경영본관 앞에 놓인 <관계항>. 출처: The Hankyoreh
이우환의 대표작 ‘관계항’ 시리즈는 다양한 재료들이 서로 대화하듯 관계를 이루는 작업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그는 평평한 유리판이나 철판 위에 거대한 화강암을 올려놓아, 각 재료의 본질과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탐구했죠. 유리의 연약함과 돌의 무거움이 충돌하며 각 재료가 가진 고유한 물성을 강조하는 작품인 것입니다.
1960년대 이우환은 일본에서 ‘모노하(もの派)’ 운동에 참여하며 물질 자체의 본질과 관계를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노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 소비 문화를 거부하며 재료 본연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예술을 추구했는데요. 이우환은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돌, 철, 유리 등 서로 다른 물질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긴장을 형성하는지 탐구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사물의 배열을 넘어, 그 안에 담긴 관계와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철학적 선언과도 같죠.
점과 선: 반복 속에서 발견한 차이

부산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1974)>.
1970년대에 접어들며 이우환은 붓을 통한 반복적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점’과 ‘선’을 주요 표현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붓질 속에서 각 점과 선이 단순한 기록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 자리 잡는 순간을 포착했죠. 한 번의 붓질마다 강조된 각기 다른 리듬과 표현은 단조로운 반복에서 해방된 개별성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특히, 그는 동양의 전통적 무기안료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색조와 감각적인 터치를 작품에 담았습니다. 붓의 압력과 속도, 물감의 양에 따라 점과 선의 미세한 변화가 발생하며, 이우환은 이를 통해 각 요소들이 독립적임에도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탐구했습니다. 그의 점과 선은 단순한 그래픽적 요소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 간의 만남과 사유를 상징하는 예술적 언어입니다.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운 붓의 춤

2024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 프리뷰 전시장에 걸린 이우환 화백의 <동풍(1984)>. 개인 소장.
980년대 이후, 이우환의 작업은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즉흥적인 정신을 담기 시작합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바람으로부터’ 시리즈는 선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흐르거나 방향을 바꾸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그려냅니다. 이 작풍은 정형화된 반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죠.
‘바람으로부터’ 연작에서는 붓이 만들어내는 흔적이 일정하지 않고, 물감의 농도나 붓의 압력 또한 각기 다릅니다. 이는 작업을 단순히 통제된 행위로 보지 않고, 자연의 우연성과 조화를 탐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람처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며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작품에 담고자 했습니다.
조응: 점과 공간이 만드는 대화

이우환 화백의 <조응(2004)>. 대구미술관 소장.
1990년대 들어 이우환은 ‘조응’ 시리즈를 통해 더욱 간결하지만 강렬한 작품 세계를 보여줍니다. 짧고 간결한 붓질로 이루어진 ‘조응’ 시리즈는 넉넉한 여백을 중심으로, 작품과 관람자, 공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지향합니다.
그는 단순히 그림 그리기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여백을 활용해 소통의 가능성을 담아냈습니다. 그의 여백은 비워진 공간이 아니라, 감각과 사유를 넘나드는 열린 장으로 작품 외부와 내부를 연결합니다. 이우환 화백은 점 하나에도 여러 차례의 섬세한 터치를 가하며, 그 점이 공간과 ‘조응’하고 살아 숨쉬는 존재로 나타나길 바랐습니다. 결국, ‘조응’ 시리즈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작품과 공간, 관람자가 함께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과도 같죠.
이우환의 작품들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철학적 질문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장르를 제공합니다. 관계와 여백, 점과 선으로 확장된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죠.
그가 점 하나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관계와 만남이라는 인류 보편적이고도 철학적인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우환 작품 세계의 더 깊은 이면을 탐구하며 그의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