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피어난 예술가의 씨앗

© 중앙일보
1928년 충청북도 창원군에서 태어난 윤형근. 그는 이름부터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들의 이름을 미리 정해, 여섯 아들이 태어나면서 각각 원근, 형근, 천근, 도근, 인근, 의근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죠.
윤형근의 아버지는 경성고보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낙향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윤형근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한옥에서 대가족과 함께하며 가난 속에서도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로 향한 예술가의 꿈

© 서울대학교
젊은 날의 윤형근에게 예술가는 낯선 꿈이었습니다. 청주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금융조합에 취직했지만, 몇 달 만에 사직하며 예술의 길을 선택했죠. 트럭을 타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첫 입학시험에 응시하게 됩니다.
시험장에서 당시 시험 감독을 맡았던 김환기 화백과의 만남은 그의 예술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이후 윤형근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곧 그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오게 됩니다.
‘인생 공부’의 서막

© 대한경제
윤형근은 서울대학교 입학 직후, 국대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재적 처분을 받습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그는 ‘좌익 연루자’로 분류되어 보도연맹에 소속되고, 총살 직전까지 몰립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이 경험을 “스무 살에 반백이 되었다”고 회고하며 평생 잊을 수 없던 죽음의 문턱에 섰던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부역하며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억울한 수감 생활을 하며 혹독한 현실과 맞서야 했죠. 하지만 윤형근은 이 모든 고난을 삶의 ‘인생 공부’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교단에서 펼쳐진 또 다른 시련

© 숙명여자고등학교
1956년, 윤형근은 홍익대학교에 편입해 공부를 마치고 1961년, 숙명여고 미술 교사로 교단에 서게 됩니다. 안정된 삶을 시작하려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숙명여중에서 숙명여고로 진학한 학생의 성적 조작 사건이 드러나자, 윤형근은 이를 강하게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다시 억울한 구속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 또한 그에게 고난 속 인간의 본질과 부조리를 사유하는 예술적 성숙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삶의 투영: 작가로서의 시작
억울한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청년기. 윤형근은 그러한 고통과 상처를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양심과 정의를 지키려는 의지를 자신의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감옥에서의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겪으며, 윤형근은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작업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깊은 내면적 통찰과 독창적인 화풍을 가지며 작가로서 점점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갔습니다.
윤형근의 예술 세계는 단순히 미술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삶의 고난과 억압 속에서 얻은 통찰을 그의 캔버스 위에 녹여낸 그는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대변하는 화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성과 정의를 놓지 않았던 그의 여정은, 우리의 삶과 예술에 깊은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윤형근의 예술적 여정을 조명하는 다음 편에서는 그의 작품 세계와 철학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현대미술의 큰 축을 이뤘던 그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